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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03

先帝虑汉, 贼不两立, 王业不偏安, 故托臣以讨贼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故知臣伐贼, 才弱敌强也. 然不伐贼, 王业亦亡. 惟坐而待亡, 与伐之? 是故托臣而弗疑也. 臣受命之日, 寝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五月渡泸, 深入不毛, 并日而食. ——臣非不自惜也: 顾王业不可偏安于蜀都, 故冒危难以奉先帝之遗意. 议者谓为非计. 今贼适疲于西, 又务于东, 兵法“乘劳”: 此进趋之时也. 谨陈其事如左:

선제께서 한실과 조조는 양립할 수 없다고 근심하신 바, 왕업(한실의 부흥)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셔서 신께 명을 내리시어 조조를 토벌하라고 하셨나이다. 선제의 영명하심으로 신의 재주를 익히 잘 알고 계시었기에 신의 조조 토벌은 신의 재능이 없고 조조는 강함을 잘 알고 계셨나이다. 하지만 조조를 토벌하지 아니함은 한실의 멸망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을 토벌하는 것이 어찌 틀리다 하겠나이까? 이런 연유로 선제께서는 신에게 조조 토벌을 명하셨나이다. 선제의 명을 받은 후 신은 편안하게 쉬지 못하였고 음식의 맛도 알지 못했나이다. 신은 오로지 북벌만을 생각했고 이를 위해 남정을 행하였나이다. 그런 연유로 5월에 호수를 건넜고 불모지인 남방으로 진군하였으며 식음을 전폐하며 명을 받들었나이다. 신은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실의 부흥을 위해 서촉에 편안하게 머무를 수 없음을 생각하여 선제의 어려운 유명을 받들었나이다. 혹자는 지금 거병함이 상책이 아니라 하나 작금의 적은 서쪽에서는 피곤함에 지쳐있고 동쪽으로는 또 동오와 맞서고 있으니 병법에 이르기를 적의 피로함으로 승기를 잡는다와 같은 상황이라 하겠는바 폐하께 공경으로 북벌을 청하옵니다.

 

高帝明日月, , 然涉, 危然后安; 今陛下未及高帝, 臣不如良,,而欲以策取,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 王朗, 各据州郡, , , 群疑, 众难塞胸; , 明年不征, 使策坐大, : 此臣之未解二也. 曹操智, 于人, 其用兵也, 仿怫孙,, 然困于南, , 危于祁, 逼于黎, 北山, 殆死潼, 然后定一; 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曹操五攻昌霸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而李服, 委任夏侯而夏侯, 先帝每, 有此失; 臣弩, 何能必: 此臣之未解四也. 自臣到, 期年耳, 丧赵,,,,丁立,寿,,邓铜, 驱长七十余人, , , , 一千余人, 此皆十年之, 合四方之精, 非一州之所有; 复数, 则损三分之二也. ——何以图敌: 此臣之未解五也. 今民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 劳费正等; 而不及今, 欲以一州之地, 与贼持久: 此臣之未解六也.  

한 고조께서는 해와 달처럼 영명하시고 모사와 신하들도 그 생각이 깊어 수없이 많은 역경과 상처를 딛고 위기에서 평안을 찾았으나 지금의 폐하께서는 한 고조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하들 역시 장량과 진평에 미치지 못하여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승리하시려 하옵고 지금의 상황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 하시니 이것이 신이 알지 못한 첫 번 째이옵니다.

 

유요와 왕랑은 자신의 영지에 앉아 입으로만 평안과 계략을 논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성현의 도리인 체 하여 마음속에는 의문과 어려움만을 생각하여 오늘은 싸우지 아니하고 내년은 전쟁에 나가지 아니하는 방법으로 차일 피일 미루다가 손책으로 하여금 강동을 병합하도록 하였는 바 이는 신이 알지 못하는 두 번째이옵니다.

 

조조는 지모가 뛰어나고 용병에 밝아 손빈과 오자서에 뒤지지 아니하나 남양에서 곤란을 겪었고 오소에서 위험에 처했으며, 기련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려양에서 쫓김을 당했고 북산에서 거의 패했고 동관에서 죽을 뻔 한 후 현재는 위태로운 평정을 찾았는 바 신의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위험 없이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어찌 가능할 것인가가 신이 알 수 없는 세 번째입니다

 

조조는 다섯 번이나 창패를 공략하였으나 이를 얻지 못했고, 소호를 네 번이나 건넜으되 얻지 못했으며, 이복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이복의 반란으로 죽을 뻔 하였고, 하후연을 중용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패배하여 사망하였나이다. 선제께서는 조조를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평하였지만 그 역시 많은 실수를 하였나이다. 하물며 신 같이 미천하고 재능이 없는 자가 어찌 바로 승리를 얻겠나이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 네 번째 입니다.

 

신이 한중에 이른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및 구장과 둔장 일흔 남짓을 잃어(전쟁으로 잃은 것이 아니라 사망하였다는 말임) 선봉을 책임질 장수가 없으며 총(전한시대 사천, 호남 지역의 소수 민족들), (사천, 산서 서북 지역의 소수 민족들로서 기병이 뛰어남)의 각종 기병을 잃은 것도 천 여명이 넘는바 이들 모두 수십 년 동안에 걸쳐 각지에서 힘들게 모아 들인 정예 병력이지, 한 주에서 얻은 사람들이 아닌 바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의 삼분의 이는 줄어들 것이니(나이가 들어 사망하거나 흩어진다는 말)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무찌르시겠나이까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다섯 번째입니다.

 

작금 백성이 곤궁하고 군사들이 피로하나 지금은 전쟁을 중지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전쟁을 중지할 수 없다면 군대를 주둔 시키고 적을 토벌하여야 함에 그 소모되는 역량과 비용은 정비례할 것인데 적을 토벌하지 아니하고 한 주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조조와 오랜 시간 동안 대치하려 하는 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여섯 번째입니다. 

 

 平者, 事也. 昔先帝败军于楚, , 曹操拊手, 天下已定. ——然后先帝东连吴, , 西取巴, , 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 成也. ——然后, 羽毁, 秭归蹉跌, 曹丕: 凡事如是, 可逆. 臣鞠躬, 死而后已; 至于成, 非臣之明所能逆睹也.

무릇 천하를 논함은 쉽지 않은 일로서 이전에 선제께서 초나라 지역에서 (신야에서 강릉까지)패하였을 때 조조는 천하기 이미 평정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후 선제께서 동으로는 오나라와 연합하고 서로는 파, 촉을 취하여 북벌에 나서 하후연을 참수하였으니 이는 조조의 실기라 할 것이며 한실의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이후 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가 패배하여 죽고 선제도 동오 정벌에서 패하시고 조비가 칭제하니 모든 일들이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신은 온 몸이 부서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이니 그러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나이다. 무릇 모든 일의 성패와 이로움은 신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사실 후 출사표는 제갈량이 쓰지 않았다는 학설이 많아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그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 제갈량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진의 통일 이후에 제갈량의 문서들을 엮어 만든 제갈문집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이 내용 중에서도 후 출사표는 정확한 저자를 알기 어렵다. 혹자는 손권 동오의 제갈각이 북벌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후에 적었다는 말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문장을 보면 전출사표의 비장함과 충성심은 그대로이나 몇 가지 제갈량이 쓰지 않고 후세에 누군가가 썼다고 생각할 만한 부분이 있기는 있다.

 

당시 제갈량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함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황호 같은 환관 조차도 제갈량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했으며 정권을 가지고 있는 제갈량이 단순히 누군가의 생각 때문에 정벌을 하지 못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 비장함의 내용이 지나쳐 이미 망한 한실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으로 가득찬 부분도 그렇고 이 후출사표를 썼다고 전해지는 226년에는 조운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부분도 애매하다. 실제로 조운은 229년 병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학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누가 썼다고 하기 어렵고 충성과 비장함은 오히려 전 출사표를 능가하기에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凡事如是, 可逆. 臣鞠躬, 死而后已; 至于成, 非臣之明所能逆睹也”의 내용은 이후에도 전해져 중국에서 중요한 직책이나 관리를 책임 질 때에 자주 인용되는 글이기도 하며 등소평이 개혁 개방 정책을 할 때 그리고 주용기 총리가 부패 개혁을 하면서 관을 들여놓고 일을 시작하자고 할 때에도 이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정확하게 번역해보면 “세상의 일들(흥망과 성패)이 예견하기가 어려우나 신은 허리를 굽혀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나이다. 승리와 패배 그리고 이의 이익과 손실은 신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라 사료됩니다.” 즉 세상의 일이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무너진다는 일반적인 예견과는 달리 뛰어난 사람과 욱일 승천하는 국가도 쉽게 망할 수 있고 약한 자도 그 대의 명분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으므로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인 바 자신은 모든 것을 바쳐 한실 부흥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말이 된다.

 

제갈량을 두고 자신의 아집과 한실 부흥이라는 봉건적 구시대적 개념을 일생을 살았다고 하는 비난도 있고 오히려 이러한 비난이 지금의 중국에서는 더욱 인정을 받는 듯 보인다.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식자들은 제갈량을 비난하고는 한다.

 

하지만 일생을 바쳐 일하면서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축재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아들이나 손자까지도 국가를 위해 촉한의 멸망까지 버티다가 자살 하거나 전사한 것으로 보아 이 모든 일들이 그의 단순한 공명심이나 사심으로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후세에서 자기를 알아줄 것이라는 공명심과 허영심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고 할 것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이순신 장군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아니하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말엽 노량으로 나가지 않거나 노량에서 이긴 후 다시 재건한 약 2만 명의 수군과 300여 척의 전함과 수송선을 이끌고 서해를 역류하여 마포나루로 들어와 경복궁으로 진군하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불멸이란 소설에서 추측하지 않더라도 뱃길로 진도에서 마포나루까지는 잘 훈련된 이순신의 수군이면 이틀이면 될 것이고 (시속 8-12km 정도 됨), 마포나루라면 경복궁까지는 불과 두 세시간이면 될 것이다. 그 수 없는 전쟁에서도 백성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보호하고 부서진 몸을 이끌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런 위인이 자신을 후대에서 알아주게 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였겠는가? 제갈량도 이순신도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신하이자 중국이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소중한 조상이라 할 것이다. 결점이 없거나 거의 없는 그들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그들이 추구했던 당시의 최선의 이익과 이상을 그대로 남겨서 우리가 이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이미 처음 세상으로 나올 때부터 한실의 부흥이 어렵고 불가능 함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작은 일에서는 우리들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비통함에서 큰일로 보면 국가나 기업이 망한다고 무책임하게 떠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은가 생각한다. 불가능 하기에 나서지 않으려 한 것이고 그렇게 은거하여 살아가자니 마지막 남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순신은 살 수 있었다. 명의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수군 도독도 될 수 있었고, 자신을 생명처럼 따르는 군사들로 역성 혁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명의 수군 도독이 되었거나 책임있는 군 사령관이 되었다면 아마도 명나라가 그렇게 쉽게 청에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이순신 장군이 고의로 죽으려고 했다는 말은 무리가 있다 하겠으나 실제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그는 갑옷을 입지 않았고 제일 선봉에 섰으며 노량해전이 끝난 후 전사한 군사와 장군이 아주 적었고 또 그 전사가 이순신을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었다는 점에서는 좀 어이가 없어지기도 한다.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고 적어도 자신의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제갈량도 같지 않았나 싶다.  국가와 백성을 위한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다면 그 순수함 그 자체로 그들을 믿어주는 것이 흐르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며 자세가 아닐까 싶다.

“凡事如是, 可逆. 臣鞠躬, 死而后已; 至于成, 非臣之明所能逆睹也”

(fan shi ru shi, na ke ni jian, chen jugong jn ui, si er houyi; zhiyu cheng bai lidun, fei chen zhi ming suo neng ni du ye:판스루스,난커니지엔, 천 쥐궁진추에이, 스알 허우이; 쯔위 청빠이리둔, 페이천즈밍소능니두예)

 

중국어를 한다면 한 번쯤 익혀두고 싶은 문장이라 할 것이다. 간결 명료, 비장함과 충성심 그 어느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다 할 것이다. 生即死,死即生의 간결한 말로 대변되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과 함께 아주 느껴지는 것이 많은 문장이라 할 것이다.




출사표-02

1편에 이어서 내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서술해본다. 출사표가 쓰여진 시기는 건흥 15년 즉 서기 227년으로서 당시 제갈량의 나이는 45-46세 전후로 보이며 유비에게서 등용된 것이 20대 중반으로 보면 실제로 촉이라는 나라를 전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 것도 37-40세 전후부터이므로 적벽 대전 이후부터 촉한 정립까지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래의 연표를 간단히 보면 제갈량의 상황을 좀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01)181년 전후 출생

(23)204년 전후 유비에게 등용됨

(27)208년 적벽 대전 참가

(30)211년 유비 서촉으로 진군,관우와 제갈량은 형주를 지킴

(31)212년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을 이끌고 백제성, 강주, 강양 등 점령

(33)214년 익주 점령(유장 항복, 유비 익주목이 됨)

(37)218년 한중 점령(유비 한중왕이 됨)

(40)221년 유비 황제를 칭하고 제갈량은 승상이 됨

(40)221년 가을 유비 관우 복수와 형주 수복을 위해 동오 정벌 진행 

(42)223년 유비 동오에 패배하고 백제성에서 사망

(44)225년 제갈량 남만 정벌

(46)227년 둔병 및 1차 북벌

(46-54)227-234년 제갈량 2-3차에 걸쳐 북벌

(54)234년 제갈량 사망

 [Google Maps에서 발취하여 제작(현대 지도)]

 

이러한 과정을 본다면 그리고 당시의 교통 수단과 거리를 상기의 현대 지도와 같이 파악해 본다면 전반적인 정국과 천하 삼분지계를 제갈량이 머리 속에 가지고 있었더라도 약한 국력과 인재난 속에서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지도를 통해서 살펴보자.

 

위의 지도와 제갈량의 행적을 살펴보면 우선

1. (31)212년 형주에서 전쟁을 치르며 익주(성도로 이동)

2. (23)214년 익주 점령 및 국가 정비

3. (37)218년 한중 점령 (성도에서 한중으로 이동)

4. (40)221년 유비 칭제 (칭제이므로 한중에서 다시 성도로 이동)

5. (40)221 공명이 지키고 유비가 성도에서 동오로 이동하다가 영안으로 후퇴

6. (42)223년 유비 사망-제갈량 백제성으로 이동

7. (44)225년 유비 사망 후 성도로 귀환 후 다시 남만 4군 정벌 진행 후 성도 귀환

8. (46)227년 천수 가정 일대까지 북벌

9. (46-54)227-234년 제갈량 5차에 걸쳐 북벌 약 3번에 걸쳐 성도로 돌아옴

10. (54)234년 제갈량 사망

 

상기에 근거해서 제갈량이 이동한 거리를 살펴보자.

 

1.    형주-무한: 형주니까 지금의 무한 부근 100km내외로 판단하면 지금의 고속도로를 가더라도 1,500km의 거리이므로 또한 물길로 가더라도 무한 삼협과 수 없이 많은 험준 계곡을 통과해야 하므로 또한 장비와 조운을 나누어 난적 황충과 엄안 등을 물리치며 가는 길이라면 족히 몇 달은 걸렸을 것이다. 212년은 제갈 공명이 주도를 했던 아니던 간에 성도로 이동하는 전쟁으로 또 서촉에서 고립된 유비를 구하러 가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소모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유비가 서촉 지역에서 유장과 대치하면서 군사로 갔던 방통이 낙봉파(실제로는 있는지 모르는 지역)에서 패배하여 고립된 상황이었으므로 만약 제갈량이 전쟁을 주도하였다면 성질 급하고 정치적 식견이 없는 장비나 아직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한 조운 보다는 유비 보다 9살이나 많았다는 관우를 형주에 남겨 형주를 보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본다. 또한 이 당시의 유비군의 정예는 대부분 서촉 지역으로 갔으므로 제갈량이 새로 모집하여 준비한 병사와 모든 군사 물자는 형주의 대부분의 것을 준비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관우 또한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많은 욕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    익주 점령 및 국가 정비: 제갈량에게 주어진 시간은 213년부터 215년까지 2-3년 남짓으로 보이며 이때 제갈량은 총책을 책임진 군사라기 보다는 현대의 기업으로 이야기 하면 관리 부장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장이 오래 전부터 점령하였던 지역을 병합하고 서촉(익주)의 여러 곳을 평정하는 작은 전쟁을 치르고 한중의 장로 혹은 위의 조조를 방어하기 위해 군사, 경제, 내정의 정립에 많은 공이 필요했을 시기로 보인다.

3.    한중점령: 217년부터 준비하여 218년에 한중을 점령하는 것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성도에서 출발하여 한중 지역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얼마 전 사천 여행기에서도 쓴 이야기지만 성도로부터 한중까지는 고속도로도 지난 몇 년 전에 개통되었을 정도로 아주 험산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물줄기를 타고 갈 강도 방향이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2000m가 넘는 산들을 넘어서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여야 했을 것이므로 전쟁은 이미 216년 말에 준비하여 217년에 출발하였을 것이고 218년에 전쟁을 거쳐 한중을 점령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간에는 수 없이 많은 요새와 관들이 있었으므로 이를 넘어 진행한 전쟁을 원만하게 그리고 위의 방해 없이 수행한 것으로 보아 제갈량의 식견과 전쟁에 대한 능력도 상당히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제갈량 이동 거리는 600-700km정도로 판단된다.

4.    유비 칭제: 유비가 한이라 명하고 황제로 등극하는 시점으로서 221년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 때에 이미 성도로 제갈량은 돌아왔으므로 한중 지역을 점령한 후 몇 개월 동안 위의 방위선을 정비하고 해당 지역을 안정 시킨 후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고 보이므로 219년 초에 출발하여 성도로 돌아왔고 다시 성도 지역의 안정과 국가 기강, 국가로서의 모습을 2년 정도 동안 준비한 후 유비를 등극시키는 시점이다. 이동거리는 최소 600-700km로 판단된다.

5.    형주 전쟁 및 동오 정벌: 같은 해 관우의 실책과 동오의 공격으로 형주를 잃고 유비는 10만 대군(실제로는 5-6만 수준으로 판단됨)을 이끌고 동오를 공격한다. 제갈량 등 수 없이 많은 중신들이 반대하였으나 이성을 잃은 유비는 형주 공격을 감행하며 불과 몇 달이 못되어 백제성 즉 영안 지역으로 대패하고 물러선다. 제갈량은 이 전쟁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이며 유비 사망 직전에 남은 군대를 이끌고 백제성으로 향한다. 기간은 221년 가을부터 223년 초까지로 보이며 이동 거리는 약 300-500km정도로 판단된다.

6.    남만 정벌: 225년에 시작된 것으로 정사는 판단하는데 이러한 경우 223년 유비가 죽은 후 군대를 이끌고 다시 성도로 후퇴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며 (삼국지 연의에서 추적하는 육손의 군대를 팔진도로 막아내는 과장된 진술이 있는 부분) 224년에 준비를 하여 225년에 남만지역 삼국지 연의에서 처럼 베트남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운남성 동북부 지역으로 추측되는 남만 4군을 정벌한다. 거리는 성도에서 운남성 곤명, 대리 지역까지 일 것이므로 역시 1000km이상의 거리이며 왕복 약 2000-2500km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사에는 정벌하였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나오고 일부에서 맹획의 77금이란 단어가 보이기는 하나 현실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전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벌을 위해 후방을 완전히 정리하는 개념의 확장전이 아니었나 싶다. 출사표를 쓰고 북벌을 진행하는 것이 227년 이므로 실제로 남만 정벌은 1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한 것으로 보이므로 진군하면서 점령하고 자치 정부로 남기고 조공 체제를 만들고 바로 돌아온 것으로 보면 될 것으로 보인다.

7.    북벌: 227년 출사표를 기점으로 한중을 지나 가정, 천수, 기산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한 시기로 제갈량이 성도를 4번 정도 왕복했다고 가정하면 8년 동안 강력한 위의 대군을 맞아 약 3-4차례의 대규모 전쟁과 6-7차례의 중소 규모 전투를 반복하면서 성도를 4-5차례 왕복하고 내정까지 흔들림 없이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 기산은 지금의 보계시 옆 서안(장안에서 100km내외 지역으로 추측됨)근처이며 고속도로로 보면 약 700km이나 실제로는 산을 넘어 약 1000km이상을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매년 2000km이상을 실제로는 3000km가까운 거리를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기와 같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추정해 보면 제갈량은 유비에게 등용된 이후 약 20여 년을 그야말로 혹사 당하면서 외침과 내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제갈량은 무신이 아니고 특별히 무술을 익힌 사람도 아니다. 또한 유람을 간 것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한 것이므로 수레를 탔던 말을 탔던 몇 만km의 거리를 원시적 수단으로 움직여야 했고 실제로 제갈량 말년을 보면 폐결핵을 심하게 알았던 것으로 추측되는 바 결핵이라는 병은 휴식을 가장 중요시 하는 병이므로 이러한 과정 중에서 심하게 몸을 혹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유선을 내치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을 만큼 믿는 부하와 장군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1세대 인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이므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부하지 않고 권력을 농단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어리고 철 없는 황제를 보필하면서 대위 전쟁을 수행하였고 이러한 시기에도 내정은 큰 흔들림이 없었으며 법치 국가를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혹은 역사가들이 전 출사표를 명문으로 꼽지만 이어서 소개할 후 출사표의 마지막 구절은 몸을 혹사시키면서 한나라를 부흥하고자 하는 제갈공명의 마음가짐이 나타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후 출사표를 더욱 좋아한다. 하지만 후 출사표의 경우는 제갈량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학설도 있고 그 학설 역시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서 그 부분은 아쉽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후 출사표에서 논해 보기로 한다.

 

-3편 후 출사표에서 이어짐-

 


출사표-01

중국 젊은이들이 우리의 훈민정음이나 난중일기 혹은 독립선언문과 같이 읽고 배우고 외우는 삼국지 제갈량의 출사표를 번역해 본다. 우선은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본문을 먼저 해석해 본다.

 

先帝创业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危急存亡之秋. 然侍之臣不懈, 忠志之士忘身于外者: 盖追先帝之殊遇, 之于陛下也. 开张圣, 以光先帝, 恢弘志士之; 不宜妄自菲薄, , 以塞忠之路也.

  선제께서 창업하신 후 과업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붕어하시니 작금의 천하는 셋으로 나뉘었으나 익주는 궁벽하고 외진 곳이라 지금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시기라 할 것입니다. 안으로는 대신들과 시위들은 나태하지 않고 밖으로는 충의지사들이 변경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모두 선제가 생존하실 때에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특별한 환대를 그리워하여 폐하께 이런 모든 것을 보답하고자 함입니다. 폐하께서는 성심과 영명 하심으로 이치를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기신 미덕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충의지사들의 의기를 더욱 넓히셔야 할 것이므로 스스로를 가볍게 보아서 대의를 잃지 마시고 충신들의 권고와 충언을 막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中府中, 一体; , 不宜; 若有作奸犯科及忠善者, 宜付有司其刑,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法也. 侍中、侍郭攸, 费祎, 董允等, 此皆良,, 是以先帝拔以陛下: 愚以为宫中之事, 事无大小, 悉以咨之, 然后施行, 必能裨补阙, 有所广益.

궁중과 관부가 하나이므로 상벌이 분명하게 같아야 하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거나 선량한 일을 한 자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관련 부문으로 이관하여 상벌을 분명하게 논하여 백성들이 폐하를 공평하고 영명한 군주로 받들게 하여야 하며 사사로움과 편견을 멀리하여 궁중과 관부가 항상 일치하는 법치를 이루소서시중 시랑 곽유지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양심을 따르는 자들로서 그 뜻과 충의가 순수하여 선제께서 등용하여 폐하께서 중용하시도록 한 충신들입니다. 궁중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일의 대소와 관계없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먼저 자문하신 후 시행하시면 될 것으로 사료되며 이를 통해 부족함을 메우고 보다 효과 있는 정치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将军, 性行淑均, 晓畅军, 用于昔日, 先帝之曰能, 是以众议, 举宠为. 愚以为营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 和睦, 劣得所也. 亲贤, 小人, 此先所以隆也; 小人, 远贤, 此后所以倾颓. 先帝在, 此事, 息痛恨于桓, . 侍中, 尚书, , 参军, 此悉良死之臣也, 愿陛下, 信之,则汉室之隆, 日而待也.

장군 향총은 성정과 행동이 정숙하고 바르며 군사를 소상히 알고 있어 선제께서도 중용하셨으므로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여 그를 중군 도독으로 등용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군영의 일과 관련된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신다면 행군과 진법 및 군대의 단결에 문제가 없이 모든 것이 적절하게 발휘될 것입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심은 전한 왕조가 흥성한 기본이 되는 것이며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함은 후한 말엽의 국가가 기울어지는 원인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에 신께 하교하실 때에 환제와 영제의 시대를 통한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나 이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 이 모든 신하들이 국가를 위해 진충보국할 신하들이므로 청하옵기를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하시고 믿으신다면 곧 한실을 부흥시키는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臣本布衣, 躬耕于南, 苟全性命于, 不求闻达. 先帝不以臣卑鄙,自枉屈, 臣于草之中, 咨臣以世之事, 由是感激, 先帝以驱驰. 值倾, 受任于败军, 奉命于危, 二十有一年矣!

신은 평범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밭을 갈고 살았기에 이 난세에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제후들의 등용을 바랄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선제께서 저의 비천함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어 제 초막으로 세 번이나 오셔서 천하의 대계를 물으시니 신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어 선제를 따르게 되었나이다. 이후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선제의 위임을 받아 일을 해 온지 어언 21년이 지났습니다.

 

  先帝知臣谨慎, 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 忧叹, 恐托付不效, 先帝之明,故五月渡,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当奖率三, 北定中原, 驽钝, 除奸凶,兴复汉, . 此臣所以先帝, 而忠陛下之分也. 至于斟酌, 进尽忠言, 攸之, , 允之任也. 愿陛下托臣以讨贼兴复之效, 不效治臣之罪, 以告先帝之; 若无德之言, 则责攸之, , 允等之慢, 以彰其咎. 陛下亦宜自, 以咨善道, 雅言, 深追先帝遗诏. 臣不受恩感激! 当远, 表涕零, 不知所云.

선제께서 신이 신중함을 아셔서 붕어에 임하여 제게 중임을 맞기 셨나이다. 중임을 받은 후 밤낮으로 걱정과 탄식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선제의 유명을 받들지 못하고 선제의 영명에 해를 끼칠까 두려워 신은 5월에 호수(운남으로 들어가는 강)를 건너 불모지(남방으로서 운남성 및 광서 자치구 일대)으로 원정을 갔었습니다. 작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사는 충족하므로 삼군을 독려하여 이끌고 북벌을 감행하여 신의 별 볼일 없는 능력을 모두 발휘하여 간흉을 제거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키고 국도를 수복하려 합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길이며 폐하께도 충성을 다해 본분을 지키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사리를 따지고 충언을 고하는 등의 정무는 곽유지, 비의, 동윤 등에게 책임이라 하겠나이다.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을 제게 맡겨 주시시고 만약 제가 이를 성공하지 못할 경우 신을 벌하셔서 선제의 영령에 이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충언과 충심을 간하지 아니하는 경우,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을 벌하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명을 받아 일하지 아니함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바랍니다폐하께서도 국가대사를 생각하시고 치국의 방법을 깨우치시고 충언을 받아들이셔서 선제의 유언을 쫓으신다면 신은 감격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사옵나이다오늘 폐하를 떠나 먼 길을 가니 올린 출사표에 눈물이 멈추지 아니하여 무엇을 썼는지 모르겠사옵나이다.

 

상기와 같은 내용이 우리에게 아주 유명한 저 나관중 삼국지와 진수의 정사 삼국사에 모두 나오는 제갈공명의 출사표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갈공명의 적벽 대전과 동풍을 불어오는 이야기 등 수없이 많은 고사를 알고 있지만 당시의 현실적인 내용과 제갈공명이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제갈공명과 그의 명문인 출사표를 번역해 보았다.

 

굴원, 이백, 두보소동파 등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최고의 시인들의 화려하고 함축적이며 아름다운 부()나 시(), () 등과는 달리 제갈 공명의 출사표는 장엄함과 충성심 그리고 비장함으로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문장이 경박하지 아니하고 간결하고 명확하다. 아마도 본인의 성격과 당시 촉한의 상황 등을 같이 고려했을 때 나오는 진심의 문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한 달 전에 출사표를 번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삼국지 바로읽기'를 쓴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에 대한 생각과 이문열의 삼국지 등을 다시 읽고 그리고 나름대로 제갈 공명이란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다시금 돌이켜 보다가 그만 늦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게으름 덕택이 그나마 올라가던 내 글을 읽어주던 분들의 방문도 거의 끊어지고 말았지만......

 

제갈량은 후한 말엽 181년에 태어나 234 54세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복씨 남양 제갈씨에 이름은 양이며 공명은 그의 자이고 와룡 혹은 복룡 선생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재의 산동 남부 절수(浙水) 지역 사람으로 추정되며 유년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숙부에게서 자라났으며 20대 중순 경에 유비가 등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제갈 공명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수 없이 많은 고사가 있으므로 별도로 논하지 않기로 하되 다만 저 유명한 삼고초려에 대해서는 정사에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제갈량 본인이 출사표에서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았다고 하니 제갈량의 성품과 자존심을 볼 때 또 이 출사표를 쓸 때의 상황을 볼 때 특별한 거짓은 없어 보이지만,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처럼 관우와 장비를 이끌고 유비가 직접 찾아가는 드라마틱한 내용은 없었거나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냥 위의 출사표에서처럼 유비가 겸손하게 젊은 현인을 존귀하게 모신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량을 추천한 서서가 조조에게서 등용되지 못한 점을 들어 김운회 교수의 경우는 제갈량의 당시 능력이 별 볼일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나 실제로 인재의 등용이란 점이 군주의 특성과 수 없이 얽힌 인간관계에서 탄생하는 것인 만큼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듯싶다

 

정사로 판단하면 실제로 유장의 익주(지금의 성도 부근)를 얻기 전까지 제갈량의 활약은 미미한 것으로 판단되나 실제로 적벽대전의 경우 천하의 영웅과 모사, 전략가들이 조조를 대상으로 전쟁에 임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추측도 사실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제갈량의 경우는 정치가로서 적벽대전의 개전과 조조에 대항한 연합군의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주유를 비롯한 동오의 명장과 군사들이 평가 절하되어 나타난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적벽대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으나 동오의 명장이나 군사들이 평가 절하된 것과 같이 유비, 제갈량, 관우, 조운 등의 활약 또한 적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풍을 빌어온다던가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놓아 주었다던가 조조의 군대가 100만 이상이라던가 횡삭부시 등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소설의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면 될 것 같다.

 

제갈량이 위의 출사표를 쓴 것은 북벌을 수행하기 바로 전으로서 당시의 위와 초 그리고 오를 비교하면 많은 차이는 있지만 위가 10, 오가 3, 촉이 1에서 1.5정도의 국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고 할 것이다. 당신의 인구를 해당 시기의 사서를 통해 판단하면 약 50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실제로 100년 이상 이어오던 전쟁을 판단한다면 등록되지 않은 노예나 전쟁노예 그리고 유민 등을 판단할 때 또한 전쟁의 경우 오히려 인구가 늘어난다는 상황 등을 판단해 본다면 대략 5000-6000만명 정도가 중국의 중원지방 13개 주 의 인구가 아닌가 싶다. 다만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당시의 촉 지역이나 오의 지역은 사실 중원이라고 할 것도 없었으며 한족 혹은 중국이라는 범위 밖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를 세우고 초와의 천하 쟁탈전에서 승리한 유방의 경우도 잠시간 한중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중원으로 나와 승리하게 되는데 초한전의 여러 가지 내용을 보면 당시의 한중이나 성도 지역이 얼마나 낙후되고 중원으로부터 먼 지역이라고 느껴 졌는지를 알 수 있다유방이 촉과 파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한중왕이 되는 과정은 사실 유배와 같다고 느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학설이나 번역 소설의 의견들도 대부분 과장된 것이고 오히려 제갈량은 군사적으로 매우 능력이 떨어진다고 나온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소설에 의해 과장된 부분 즉 화약이나 움직이는 우마, 동풍을 빌어오는 것이나 기마 막힌 선견지명, 맹획의 칠종칠금 등 당시 소설에서 과장된 부분을 제외하면 충분히 뛰어났다고 하여도 될 듯싶다. 국력에서 무려 적게는 3배에서 10배까지 차이가 나는 위와 오를 상대로 하여 항상 공격으로 일관했고 많은 군사적 성과는 적었다고 하나 당시의 모든 전쟁을 무관들이 담당한 데에 비해 문관으로서 기타 장수들을 이끌고 큰 반란이나 모반 없이 적극적 공세로서 정국을 주도한 부분은 높이 살 만 한다고 본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천하 삼분지계는 제갈공명의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실제로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책략으로 보여지지만 내 생각은 오히려 제갈량은 한을 건국한 유방이 한중왕에서 시작하여 다시 장안을 점령하고 관중으로 성공적으로 나아간 것에 착안하여 서촉을 점령하여 기반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차이점은 조조와 항우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는 것이 제갈량에게는 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조조는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도 언급하듯이 무척이나 지략적이고 냉철하며 문무를 모두 통달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과 관련해서는 적어도 제갈량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천하 삼분지계가 능력을 발휘하여 촉은 실제로 형주 전쟁에서 관우의 착오로 형주를 잃는 것 이외에는 본토의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실례라고 하겠다.  다만 추측되는 바로는 유비 생전이나 사후의 일정 기간 까지는 개국 공신이나 관우 장비와 같은 장군들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정치 관계로 인해서 제갈량 본인의 생각대로 정국을 주도할 형편이 안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듯싶다. 제갈량과 같이 뛰어난 사람이 단순히 관우와의 관계 때문에 형주를 포기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내가 제갈량이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천수, 가정 등 서북 지역을 통한 북벌 보다는 형주로부터 바로 치고 올라가는 북벌을 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시기의 제갈량은 불과 30대 중반 무렵이었고, 유비 진영에도 부족하기는 했지만 수 없이 많은 권력 집단이 있었을 것이고 특히 유비 정권이 유랑 집단처럼 옮겨 다니다가 처음으로 성도에 자리잡은 관계로 제갈량이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신무기에 대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꼭 제갈량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지만, 오히려 소설의 허구 맹랑한 내용 때문에 그의 군사 무기에 대한 능력과 수준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 할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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